닫기

게시판

전체메뉴
3월 22일 예배 영상 2020.03.21중등부

 

 

 

제목: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성경 본문: 요한복음 12:12-16

 

https://youtu.be/1lAL5sBRT-E   <-링크 주소입니다.

 

환영받는 왕(요12:12-13)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소식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라고 환호하며 예수님을 환영했다. 이는 예수님을 잡으려던 종교 지도자들마저 놀라게 할 만큼 뜨거운 환영이었다(요 12:19).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오신 참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죽은 사람을 살리고, 기적을 일으키는 예수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정치적 지도자로 생각했다.

 

나귀 새끼를 타신 왕(요 12:14-19)

 ​그러나 예수님은 왕이 타는 흰 말이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이는 구약의 스가랴가 "유대인의 왕, 메시야가 나귀 새끼를 타고 겸손하게 입성하실 것"이라 예언했던 것을 성취하기 위함이었다(슥 9:9). 그러나 그 누구도 이런 예수님의 행동의 참의미를 깨닫지 못했다(요 12:16). 제자들과 무리는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았지만 그것이 예언의 성취인지도, 예수님이 그 예언에 약속된 왕이신지도 깨닫지 못했다. 단지 예수님을 연호하는 무리에 휩싸여 예수님이 정치적으로 성공하시면 함께 그 영광을 누리게 될 꿈만 꾸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무리의 영적 무지함에도 불구하고 홀로 나귀 새끼를 타고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셨다.

 

나귀 새끼를 타신다는 것의 또 다른 의미 

 제자들과 무리가 환호성과 종려나무 가지에 묻혀 미처 깨닫지 못했다고 해도 영광스러운 왕이 나귀 새끼를 탄 모습은 우스꽝스러운 장면이었을 것이다. 어른이 타면 발에 끌릴 정도로 작은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은, 나귀 등에 타시기는 했지만 두 발이 땅에 닿아 걷는 것과 다름없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구원을 베푸시고자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실 것이며 병거와 말, 전쟁의 활을 끊고, 화평을 전하러 오신다고 했던(슥 9:9-10)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력한 정치적 지도자를 원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평화와 겸손의 왕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

 

참된 구원의 길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흔들던 종려나무 가지는 이미 쟁취된 승리를 선포하고 승리자에게 영광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백성들은 무력으로 세상을 다스릴 권세자를 기다렸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위한 메시야로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결국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자, 찬양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던 그 손으로 예수님께 손가락질하며, 예수님을 못 박으라고 외친 무리 중의 하나가 되었다.

 

​영적 무지함에서 벗어나자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 성령의 조명을 받고 나서야 예루살렘 입성을 이해하게 되었다(요 12:16). 이런 상황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은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셨지만, 더없이 고독하고 답답하셨을 것이다.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예수님을 오해하고 허황된 주님의 형상에 경배하는 백성들의 모습에 슬픔을 느끼셨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다르지 않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채우기 위한 기복신앙의 대상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루살렘 입성 당시 종려나무를 흔들던 무리와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영적 무지에서 벗어나 진정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겸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과 동시에, 주님의 길을 위해 자신을 내어드린 나귀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출처: 토틴 4권 중

비밀번호 입력

한신교회 회원님의 소중한 정보보호를 위하여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