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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8일 예배영상 2021.04.13중등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https://youtu.be/XE9vekH_fTs

요한복음 2115-19

김태원 총무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일 두 가지 

우리 중둥부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두 가지를 들라면 그것은 아마도 죄를 짓지 않는 일과 용서하는 일일 것입니다. 인간이 육신을 지니고 있는 한 죄를 짓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흙으로 빚어졌기에 쉽사리 부서지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고해성사라는 것이 있어서,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체험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해를 받는 신부님은 고해하는 신자들에게 다시는죄 짓지 마십시오.”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는 않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은 용서하는 일입니다. 내게 끊임없이 상처를 주는 사람, 나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사람, 나에게 원수가 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어떤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런 잘못을 저지른 자기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또 그런 자기 자신에게 크게 실망해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단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려고 해도 우리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용서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베드로가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부활하신 주님은 벌써 두 번씩이나 제자들과 만났습니다. 그 두 자리 모두에 베드로도 함께 있었습니다. 첫 번째 만남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수난과 십자가 사건에 참여하지 못한 제자들의 실패를 상기시키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잘못을 질책하거나 꾸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는 따스한 평화의 인사로 제자들을 포용해 주셨고, 나아가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시며 주님께서 이 땅에서 하시던 일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하지만 수제자 베드로를 비롯한 주님의 제자들은 이 명령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아니 따르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이미 제자들을 용서했지만, 제자들은, 특히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식이나 부인했던 수제자 베드로는 자기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용서 못한 베드로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는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겠소.”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함께 있던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며 그를 따라나섭니다. 물고기를 잡으러 가겠다는 말은 주님을 만나기 전의 직업, 즉 과거의 자기 모습으로 되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을 등지고 낙향해서, 이제부터는 주님의 제자이기를 포기하고그저 평범한 갈릴리 어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분명 주님께서는 부활하셨지만 아직까지 베드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주님의 부활로 그쳤지베드로의 부활로 이어지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벌써 두 번씩이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지만, 아직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요, 예수님의 부활이 나를 위한 부활이라는 부활체험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부활체험이 없었기에 주님의 부활이 내 안에 들어와서 확신이 되고, 믿음이 되고, 헌신이 되고, 위탁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한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기에, 주님께 면목이 없고, 다른 제자들에게 체면도 안서고, 무엇보다도 자기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 전 주님 제자 될 자격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저를 대해 주셨지만, 저에게는 그게 더 부담이 됩니다. 차라리 질책하고 꾸중하셨으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을 텐데, 따스한 평화의 인사로 저를 감싸주시고 나아가 주님께서 하시던 일을 이 못난 저에게 위임하시겠다니, 저는 몸 둘 바를 모르겠고, 주님의 위임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사표내고, 낙향하겠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옛날처럼 평범한 어부로 살겠습니다.” 베드로는 이렇듯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패잔병의 모습으로 갈릴리 자기 고향 마을로 돌아간 것입니다.

 

모닥불! ! 기적의 생선!

고향으로 돌아온 베드로와 동료들은 고깃배에 다시 몸을 싣습니다. 3년 전, 주님을 만나 헌신짝처럼 버렸던 그 낡은 고깃배에 다시 올라탄 것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 던 베드로, 그는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도로 생선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비록 3년을 쉬었지만, 고기잡이로 평생 잔뼈가 굵은 그였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손바닥 보듯 환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철에 따라, 또 시간에 따라 고기떼가 어디에 몰려있는지, 오랜 경험을 통해서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는 그런 그의 경험과 지식이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모두 허탕이었습니다.

작은 생선 한 마리조차 그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았습니다. 새벽이 밝아올 무렵 저들은 밤새도록 헛수고한 일로 지칠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마지막이니 한 번만 더 던져보자는 심정으로 그물 던지기를 몇 차례 거듭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펄펄 뛰는 생선 대신, 물거품 같은 낙담과 실망만 건져 올렸을 뿐입니다. 갈릴리 호수에서는 낮에는 물고기들이 호수 바닥에서 쉬기 때문에 주로 밤에 고기를 잡습니다. 그런데 이제 날이 점점 밝아오니 고기 잡을 가망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마침내 저들은 그물질을 포기하고 텅 빈 배를 저어서 호숫가로 다가갑니다.

그런데 같은 시각, 주님께서는 나뭇가지를 모아다가 모닥불을 피워놓고, 떡을 구워놓고, 또 생선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호숫가에 서서 제자들을 기다리십니다. 배가 약100m쯤 접근해 왔을 때, 주님께서는 여보시오, 생선 좀 있습니까?” 하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대답할 기분조차 들지 않았지만,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소.” 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시오. 그러면 잡힐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소용없는 일이라고 투덜거리는 동료들을 설득하여, 베드로는 한 번 더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고기가 그물 가득 걸려든 것입니다.이제 주님은 제자들을 모닥불 주변으로 부르십니다. 싸늘한 새벽에 나뭇가지들이 타는 소리와 함께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빵이 준비되어 있고, 그 위에 생선이 놓여있습니다. 그것을 본 제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모닥불! !

그리고 기적의 생선! 이것들을 보면서 베드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주님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벌어졌던 온갖 일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뇌리를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기적의 생선은 베드로가 주님을 처음 만나 소명 받던 순간을 생각나게 했을 것입니다. 그날도 오늘처럼 밤새도록 애썼지만 베드로는 한 마리의 생선도 잡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주님의 말씀대로 따르자, 그물이 찢겨질 만큼 엄청나게 많은 생선이 잡혔었지요. 그 때 베드로는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말했으나, 주님께서는 오히려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며 그를 첫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또 빵은 주님과 나누었던 마지막 만찬을 기억나게 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잡히시던 바로 그날 밤, 주님께서는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그것을 떼어 나누어주시며 이렇게 당부하셨지요.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당신을 부인할 것도 예고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장담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닥불은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가야바 집 뜰에서의 그 참담했던 순간을 기억나게 했을 것입니다. 모닥불 앞에서 불을 쬐고 있던 베드로에게 대사제의 여종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도 저 나사렛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이지요?” 그 때 베드로는 만약 거짓말이라면 천벌이라도 받겠다고 맹세하며 나는 정녕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딱 잡아떼었지요. 그 순간 어디선가 닭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했던 주님의 음성이 생생히 베드로의귓전을 때렸습니다. 그 때 참담함과 서러움에 복받쳐 얼마나 눈물을 쏟았던 지요. 이렇듯 지금 감격과 후회가 뒤범벅이 되어 모닥불에 타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오랜 침묵 끝에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께서는 자신이 직접 지어준 베드로, 반석이라는 이름 대신에,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고 마치 그를 난생 처음 만난 것처럼 부르십니다. 이 말이 베드로의 마음에 보통 걸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 번 물으시는 물음에 겨우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고 둘러댑니다. 세 번이나 부인한 것을 다 아시면서, 세 번이나 연거푸 물으시니 어찌 괴롭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은 첫 번째 이유는 양심의 가책이란 사슬에서 그를 해방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스스로의 잘못을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고 자학하며 낙향했지만, 주님은 그런 베드로를 벌써 두 번 씩이나 찾아와 평안을 빌었고, 지금은 고향까지 찾아와 손수 조반을 준비하여 대접하시며 베드로를 영접하십니다.

그러기에 사실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은 뒤집어 생각해 보면,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고백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야, 네가 비록 나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괴로워하지 마라. 자학하지도 마라. 나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이미 너를 용서했단다.” 하는 표현입니다. 이렇듯 주님은 크신 사랑으로 우리 죄를 모두 녹여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죄가 아무리 클지라도 그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속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용서와 속죄는 다른 것입니다. 용서는 잘못한 그 사실만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속죄는 죄의 기억조차도 지워주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잘못을 용서해준 것을 넘어 속죄해 주셨습니다. 기억에서조차 지워 버린 것입니다. 주님은 주홍빛보다 더 붉은 우리 죄를 눈보다 더 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새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지금 여기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두 번째 이유는 그에게 사도직을 맡기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자기를 배반한 사람에게 어떻게 교회를 맡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의 잘못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그에게 당신 양들을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사람을 쓸 때 자격을 따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결정적인 차이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선회개 후구원을 주장했습니다. “입으로만 회개했다고 죄인이라고 떠들지 말고, 회개했다는 증거를 보여라. 행실로 보여라. 먼저 자격을 갖춰라.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세례자 요한의 구원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릅니다. 선회개 후구원이라는 도식보다는 오히려 선구원 후회개라는 도식에 가깝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세리나 창녀나 죄인이나 할 것 없이 누구든지 다 와라. 너희는 죄에서 해방됐다. 구원됐다.”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회개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먼저 구원에 대한 감격이 있고, 이에 대한 자연스런 감사의 응답으로 회개가 뒤따릅니다.복음서는 그런 예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세리 삭개오가 그랬고,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이 그랬습니다. 우리는 나는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없다고, 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의  구원 방식은 그게 아닙니다. “너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다. 그 진리를 깨달아라.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살아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많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의 뺨에는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주님의  하늘같은 사랑에 감동되어서 말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쳤을 것입니다.

주님, 이제는 절대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죽도록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 베드로는 그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할 때까지이 감격의 순간을 평생 잊지 않고 살았을 것입니다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세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네가 나를 섬기겠느냐?” “네가 나를 예배하겠느냐?” “네가 교회에 잘 출석하겠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사랑하느냐고 만 물으셨습니다. 왜 일까요? 그건 이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물론 이런 것들도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밑바탕에 사랑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말에 사랑에 눈이 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면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상대방의 좋은 점만 보이지 나쁜 점은 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아니 보기는 보아도 그 단점이 나에겐 나쁘게 보이질 않습니다. 남들은 뭐라 해도 나에겐 오히려 그 단점이 매력으로 보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다 좋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래도 감사, 저래도 감사합니다. 이래도 기쁘고, 저래도 기쁩니다. 그래서 고통 중에도 기뻐할 수 있고, 환난 중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 주님의 사랑이, 구원의 감격이 너무 커서 시련과 고통쯤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교회에 열심히 출석해라, 매일 성경을 읽어라, 십일조 생활을 해라.” 하고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강요하지 않아도 저절로 합니다. 내가 오늘의 나 된 것, 지금 내가 사는 것, 내가 이런 축복의 생을 누리는 것,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고, 희생하고, 가난해지고, 죽으셨기 때문인데, 그 사랑과 은총에 감사해서 응답으로 드리는 감사의 행위인 예배생활, 경건생활, 헌금생활이 뭐 그리 어렵겠습니까? 저들은 의무감에서 교회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기쁨과 감사로, 자발적으로 합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일은 그 은혜가 감사해서 울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교회를 살리는 사람들은 학식이 많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10명의 의인이 없어서 멸망했는데, 만약 교회를 위해 눈물 흘리는 열 사람만 있으면 어떤 교회도 시험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고 반석 위에 든든히 설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부활하신 주님께서 세 번씩이나 제자들을 친히 찾아오시고, 또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신 이야기는 마치 삼국지에 나오는 삼고초려(三顧草廬) 이야기를 보는 것 같습니다. 삼고초려란 고사 성어는 옛날 중국 삼국 시대에, 촉한의 유비가 난양에 은거하고 있던 제갈량의 초옥으로 세번이나 찾아간 데서 유래한 말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언뜻 보면 비슷한 것 같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비는 인재를 얻기 위해서 제갈량을 세 번씩이나 찾아갔지만, 주님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그를 들어 당신의 도구, 당신의 사도로 쓰시기 위해서 제자들을 세 번씩이나 찾아갔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견지에서 볼 때, 베드로는 지혜로운 사람도유력한 사람도, 가문이 좋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개 갈릴리 어부에 불과했고, 수난의 현장에서 도망쳤고주님을 부인했던 비겁자였고 실패자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그를 친히 세 번씩이나 찾아와 속죄해주시고, 양떼를 맡기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인재이기 때문에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찾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곳에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개야!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내 양을 돌봐다오.” 비록 우리는 때론 실망도 하고 좌절도 하지만, 때론 주님을 배반도 하고 실패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이미 용서하고 기다리십니다. 때때로 우린 죄책감에 허우적대며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친히 찾아오셔서 상처 난 우리 심령을 치유해 주시고, 따스한 손 내밀어 쓰러진 우리를 일으켜주시고, 꺼져버린 우리의 사명에 다시 불을 지펴 활활 타오르게 하십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주님보다 자기 목숨을 더 사랑했기에 실패했었습니다. 하지만 디베랴 바닷가에서 사랑의 주님과 다시 만나고 이제 자기 목숨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중등부여러분도 베드로가 만났던 그 주님을 다시 만나 뵙고 변화받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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